본문 바로가기
가볼만한곳

덕수궁 돌담길 따라 정동극장까지 가벼운 산책

by 프로n잡러를 꿈꿔요 2025. 4. 14.
728x90
반응형
SMALL

 

 

늦은 오후라 햇빛도 몸 사리는 시간에 맞춰

덕수궁 돌담길부터 정동극장까지

가볍게 산책하는 힐링의 시간!!

시청 앞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요

 

 

서울의 4대궁과 종묘, 조선왕릉이 관람 일시 중지가 연장돼서 입장은 불가능해요

서울시청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는 덕수궁

 

덕수궁德壽宮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입니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습니다.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돌담길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19길 24 영국대사관

기존의 도로를 보행자 중심의 도로로 재정비하고, 보행자를 위해 보도와 차도 공존도로 및 푸르름이 가득한 가로공간인 녹도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도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길이는 900m이다. 자연친화적인 점토블록 및 보행자의 안전한 보행권 확보를 위해 차도에 석고석 포장(페이빙스톤) 실시하였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위해 느티나무 외 2종 130주 식재, 평의자 20개 설치하였으며 주변의 역사적 시설인 덕수궁과 연계한 역사적 가로 경관의 창출 및 가로환경 개선하였다.낭만이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며, 주변에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이 있어 문화산책 코스로도 제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덕수궁 돌담길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덕수궁 돌담길 입구에 맛집이 있나 봐요

돌담길 쪽으로 의자가 마련될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여요

그리고 시작된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 입구, 정동 전망대는 서울시청 서소문 청사 13층에 있고 전망대에는 카페와 정도의 옛 모습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덕수궁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하는데... 휴장 중이라 가 볼 수는 없었네요

잘 정비된 보행자로 와 차로가 구분되어 있고

식재된 나무들이 푸름을 뽐내고 있어요

정비된 보행로에 화분도 고풍스러운 항아리에 담겨 예쁜 꽃을 피우고

덕수궁 주변의 여러 문화재 형상을 본떠 만든 바닥과 타일이 곳곳에 있어요.

정동교회, 중명전, 한양도성 순성길, 러시아공사...

 

초록으로 길게 뻗은 돌담과 돌담길이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까지 만들어 주네요

 

돌담길 양편으로는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들이 있어요

이건 바둑알처럼 생겼네요

'윤교터'

경운궁의 좁은 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중화문 맞은편의 땅을 확보하고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를 만들었으며 그곳으로 건너는 운교를 설치하였다.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러시아공사관에 있을 때 경운궁과 러시아공사관을 편리하게 오가기 위해 놓은 다리이다. 모양이 공중에 떠 있는 구름 또는 무지개와 같으므로 구름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운교(雲橋), 무지개다리의 뜻으로 홍교(虹橋)라고 하였다. 1966년 편찬된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교 [雲橋]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운교는 현재 덕수궁 측에 기초만 남았다는 모습이 보여요

 

 

김장생, 김집선생 생가터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1548~1631)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1574~1656)이 태어난 곳

 

이런 모양의 의자도 있어요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참 잘 만들고 가꿔져 있다는 걸 느끼며 걷게 돼요

 

손끝으로 마음을 전하는 "온기 우편함"

소중한 고민을 익명으로 보내주시면 느린 손걸음으로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 위로가 필요한 순간 찾아주세요

- 소중한 고민을 적어주세요

- 답장 받으실 주수를 꼭 적어주세요

- 온기우편함에 편지를 쏘옥~ 3~4주 후에 답장이 도착할 거예요

 

 

서울시립미술관이 바로 코앞인데 들어가지는 않고

광장 쪽에서 정동극장 쪽으로 올라가요

 

 

둥그런 공간에 분수가 나오고 주변엔 산책하는 사람들과 여러 조형물을 볼 수 있어요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눌렸지???

둥근 광장에서는

서울시립미술관, 한양도성 순성길, 배재학강역사박물관, 정동극장, 서소문공원, 경희궁.... 갈 곳도 볼 곳도 많아요

 

정동제일교회

격변의 시대, 청년들의 교육과 독립운동 중심지

정동제일교회는 배재학당의 교장이였던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입니다. 3.1운동 당시에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일제강점기 항일 활동의 거점이 되었고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열렸으며, 1920년 이화여고생이었던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경희궁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정동극장을 만나게 돼요

이 길 따 라 한 걸 음 씩 너 와 함 께

한음절씩 적혀있는 문구가 참 정감 있어요

 

정동극장에는 마당이 있는 카페 '정담'이 있어요

공영 중이던 '아랑가' 뮤지컬은 공연 중단 중이네요

고풍스런 정동극장 입구로 들어가 봐요

'정동극장'

 
정동극장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3 정동극장

덕수궁 돌담길의 아늑한 정취를 따라 걸어 들어오면 만나는 정동극장은 시민들의 이웃과 같은 생활 속의 열린 문화공간이다.정동극장은 1908년,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던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圓覺社)의 복원 이념을 담고 있는 유서 깊은 극장으로 2015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 1995년 개관 이래 상설공연 <전통예술무대>를 비롯해 <명인전>, <아트 프론티어>등의 예술성 높은 기획공연과 <정오의 예술무대>등 일반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선보여 왔다. 2010년 전통뮤지컬 <춘향연가>를 창작·초연하며 상설공연브랜드'미소(MISO)'를 성공적으로 런칭하여,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세계 곳곳의 무대에 한국의 문화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려왔다. 또한 한국 전통문화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내외국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품격있는 공연 '미소(MISO)'의 두번째 이야기 <배비장전>(서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동극장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명창 이동백

1867년 충남 서천군에서 출생한 이동백은 펜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경지에 도달함으러써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구축할 수 있었고 판소리를 품격 높은 민족 예술로 승화시켜 그 공으로 고종 황제로 부터 통정대부를 제수받았고 창극을 발전시켜 일제 강점기에 민중의 정한을 풀어 준 바 있다.

정동극장 안에 있는 카페 정담과 마당 주변으로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어요

주변 분위기도 좋고 돌담길을 걸으며 쌓였던 피로도 풀 수 있었어요

정동극장 옆길로 들어가면 바로 만날 수있는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 궁궐에 포함되었고 중명전은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에 지어져 처음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였으나, 1901년 화재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되었고 1920년 이후 중명전 이외의 건물은 없어지고, 고종이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1907년 강제퇴위 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한 덕수궁 중명전에는 코로나로 인해 들어갈 수는 없더라고요

 

다시 시청 쪽으로 나오는 길에 덕수궁 돌담길에 은은한 조명이 들어왔어요

아직 많이 어둡지는 않지만 조명이 들어와서 그런지

조명과 돌담과 주변의 나무와 풍경이 더욱 예뻐요

돌담길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 주는 조명!!

 

 

 

728x90
반응형
LIST